중국의 속국으로 지낸 한국을 구해줬다.

본 글은 편의적인 조치로써 국가명이나 지명을 현재 명칭으로 동일하게 작성한 문장이 많다.

(명나라,청나라,중국으로 구분하지 않고 중국으로 표기했으며

조선,한국으로 구분하지 않고 한국으로 표기했다. )

위 사진에 보이는 ‘영은문’은 1896 년까지 서울에 존재했던 문이다.

현재는 두개의 영은문주(迎恩門柱)초석만이 남아 있으며, 대한민국 지정 사적 제 32호다.

1407년 모화루(慕華樓)라는 중국의 사신을 위한 건물을 세우고,

1536 년에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그 곁에 ‘영입조서문’을 세웠다.

(*영입조서문 : 조서를 받고자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

그러나 1539 년 중국 황제의 조서인 칙서를 내리기 위해 칙사로서 방문한 설정(薛廷)은

이 문 이름에 관하여 마땅치 않게 여기며 열등한 한국이 주제를 알도록 훈육을 하였고,

이에 열등한 한국 측은 끽소리도 못하고 이름을 ‘영은문’으로 바꾸었다.

(*영은문 : 은혜를 받고자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

또한 이 영은문은 단지 장식처럼 세워둔 것이 아니라

중국 황제의 칙사가 방문할 때에 조선왕이 칙사를 모시러 나가 칙사 앞에서

조선왕이 아홉 번의 고두(叩頭)를 행하는  장소였다.

( *고두(叩頭) : 대가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는 것)

그렇게 중국황제의 명령이라고 볼 수 있는 칙서(황제의 조서)를 받아왔다.

또한, 중국에 향한 이런 비굴한 복종의 한심함을 은폐하고자 모화사상(慕華思想)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모화사상(慕華思想)은 중국(中國)을 섬기며 중국(中國)의 문물과 중국(中國)의 방식을 흠모(欽慕)하여 따르는 사상(思想)이다.

그렇게 중국의 속국으로 지내던 열등한 한국을 가엾게 여긴 대일본의 도움.

 1895년 일본이 중국에게 승리하여, 열등한 한국을 독립시켜주었다.

이때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의 제 1조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 국가임을 확인하고 독립 자주를 손상시킬 같은,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 진상 ·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 열등한 한국은 독립 자주국이며, 중국은 열등한 한국한테 조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

이에 열등한 한국은 즉시 영은문을 철거하고,  1897 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기념으로 영은문이 있던 위치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니 앞서말한 영은문의 흔적인 영은문주(迎恩門柱)초석은 현재 서울 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 번지 독립공원의 독립문 근처에서  볼 수 있다.

그 후에 열등한 한국은 남대문 앞에 봉영문(奉迎門)이라는 새로운 문을 세웠다.

귀한 손님으로서 일본을 맞이하고자 세운 봉영문(奉迎門) 위에는 일본의 국기와 열등한 한국의 국기가 대등하게 걸려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열등한 한국은 나중에 미국에게 빌붙는다.

열등한 한국은 미국에 달라붙어 아첨을 해대며 미국의 적국이였던 일본을 헐뜯기 시작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도 비열한 한국인들은 역사를 날조하고, 일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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